소설을 읽고

생의 이면

선인장아니면무엇? 2011. 6. 17. 14:09

 

  이승우의 『생의 이면』은 어떤 한 인간의 삶이 어떻게 종교와 겹쳐지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일종의 액자형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그 액자는 하나의 틀이 아니다. 여러 개의 액자들이 모자이크 조각처럼 모여서 하나의 큰 액자를 이루고 있다. 그런 유동적인 액자이기 때문에 액자 안팎의 구분이 선명하지 않다.

  이 소설이 자전적이라는 것은 주인공의 삶이 이승우 개인의 행적과 닮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신학대학을 나온 소설가라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 이미 이승우는 이 자전적이라는 면에 대하여 화자의 입을 빌어 변명을 해놓고 있다. 독자들은 소설을 읽다가 자전적인 면을 발견하기를 좋아하고 조금이라도 그런 점을 발견하면 곧바로 소설의 내용을 작가의 삶에 100% 연결시키고 싶어한다. 하지만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이며 다소 자전적인 면이 나타나더라도 그 때문에 소설의 내용과 소설가의 삶을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제의 이승우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른다. 전혀 현실에서 만나본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한 개의 장편과 서너 개의 단편을 통해서 그를 알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통해서 내가 알고 있는 이승우는 대단히 논리적이고 사색적이며 깊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감상적이지 않다. 장편 『식물들의 사생활』은 다소 그런 면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단편들은 상당히 지적이고 치밀했다. 내가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런 면 때문이다.

  자전적인 소설은 냉정하고 객관적이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생의 이면』이 자전적이라면 내가 읽은 이승우의 두 장편이 모두 감상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지만 『생의 이면』은 『식물들의 사생활』보다는 낫다. 그 이유는 자전적임에도 불구하고 액자형의 구성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구성을 통해서 화자는 끊임없이 우리와 주인공 박부길 사이에 거리를 만든다.

  이 소설은 보통의 종교소설과 다르다. 훨씬 인간적이다. 따뜻한 정 따위가 느껴진다는 말이 아니라 신보다 인간 쪽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말이다.

  이 소설에서의 종교의 성격이 그런 면을 보여준다. 박부길의 글이라고 인용하고 있는 다음 구절들이 그런 면과 관련된다.


  그는 신에게 투항하기로 오래전에 작정한 터이다. 그 길만이 그녀에게로 갈 수 있기 때문이었을 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는 그녀를 통해서만 신을 이해했고, 그녀를 통해서만 신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중략) 그런데 또 이상하게도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신을 통과해야만 했다. (p196)


  확실히 이 소설에서 신만큼 중요한 것은 ‘소설’이다. 액자의 틀 자체가 소설이며 작가 탐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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