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고

김혜순

선인장아니면무엇? 2011. 6. 17. 14:13

 

  그녀, 말씀의 바다에서 길을 잃다

  -김혜순의 『한 잔의 붉은 거울』(2004, 문학과지성사)



  시를 읽을 때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긴장감이 느껴지는 시, 혹은 압축된 시를 좋은 시로 본다. 그런 시는 시만이 가지고 있는 미감을 느끼게 한다. 그 느낌은 이론이 개입되기 전에 먼저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미감에 반기를 드는 것이 가능할까? 늘어지는 시, 흘러내리는 시를 우리는 새로운 시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김혜순은 시를 잘 쓰는 시인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시각적이고 선명한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요즘 그녀의 시가 흘러내린다. 이런 경향은 사실 그전 시집에서도 조금씩 예상되던 것이다. 이 흘러내림 현상을 ‘여성시’라는 면과 관련시켜서 볼 수 있을까? 선명한 은유를 중심으로 한 기존시의 감각체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을까? 시각이 아닌 복합적인 감각을 통해 새로운 세계, 마이너스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을까? 김혜순은 이미 철저한 구조물로서의 시를 지향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김혜순의 여덟 번째 시집은 ‘한 잔의 붉은 거울’이 아니라 어지럽게 내려 한바탕 흙탕물을 만드는 붉은 빗줄기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우주의 미만한 흐름들로 판화를 그리고 만다라를 만들고 우파니샤드를 이룩해왔다. 그래서 도달한 그림이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울고 있는 ‘슬픈 사랑기계’였다. 그러나 그 그림은 더욱 추상화되고 이제 우리는 그 그림을 알아 볼 수가 없다. 그것은 그녀가 달력공장 공장장님을 찾으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닐까? 우리를 맷돌처럼 갈아 삼켜버리는 우주라는 무서운 존재 앞에서 그녀의 슬픈 사랑기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필자가 김혜순의 흘러내리는 시들을 다시 보려고 하는 것은 이 마이너스의 세계, 즉 구멍의 세계 때문이다. 그녀의 시적 화자는 스스로를 구멍으로 인식한다. 화장하는 구멍, 밥하는 구멍이다. 물론 여성을 구멍의 이미지로 보아왔던 것은 김혜순만이 아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김언희이다. 하지만 그럴 때의 구멍은 성적인 이미지이며 동시에 죽음의 이미지이다. 김혜순의 ‘구멍’도 당연히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동굴의 이미지로서 자궁을 나타내는 것, 우물이나 거울의 이미지로 다른 세계로 통하도록 하는 것은 다른 작가들에게서도 나타나는 흔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녀의 구멍은 그런 이미지로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

  그녀의 구멍은 마이너스이다. 들어가기 위한 공간이고 존재 가능성의 공간이다. 존재 이전이고 존재 이후이다. 그 구멍에서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를 본다. 그래서 그 구멍은 수없이 복제된다. 그녀가 지난 시집에서 프랙탈 이미지를 보여주었듯이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거대한 거울이 무한대의 자기복제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즉 그녀의 ‘구멍’은 거울인 것이다.


  저 머나먼 공중에 벙어리 방이 하나 떠 있어요

  온몸의 구멍을 내 눈물이 다 막아버려서

  구멍이 하나도 없는 방이 하나 떠 있어요

  걸을 때마다 바닥이 물컹물컹 소리치는 방

  내 피부 같은 물 도배지를 바른 방

  나는 그 방에다가 밥상을 차렸어요

  아버지가 집에 들어올 때면

  밥상 위의 그릇들이 벌벌 떨었어요

  그래도 나는 벽장 속에다

  갓 태어난 물방울 아가들을 숨겼어요

  누군가 손가락 끝으로 누르기만 해도

  기둥조차 없어 저절로 터져버릴 방

  천장도 창문도 없어 하늘이 그대로 눈부시지만

  내 날갯짓 멈추어버리면 한없이

  곤두박질쳐버릴 그 방이 하나 떠 있어요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 너를 사랑하는 방

  그 방이 하나 한없이 떨면서 떠 있어요

                                      「붉은 이슬 한 방울」전문


  이 붉은 이슬 한 방울이 그녀의 실체다. 『여자』라는 책에서는 정자가 물방울 하나로 표현되었지만 그녀에게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붉은 이슬 한 방울이다.   

  그리고 그 구멍은 물로 가득 차 있다. 바닷물이어서 그 물에서 나온 푸른 소를 먹고 나는 각질의 소금가루를 흘리기도 하고 한 잔의 붉은 포도주여서 마셔버리기도 한다. 그 물방울은 눈물 한 방울이 되기도 하고 그 한 방울의 눈물은 내 방 하나로 커지기도 한다. 심지어 정자 하나가 될 수도 있고 물만으로 된 사람이 내 속을 지나가다 내 속에서 나오지 못해 발버둥치기도 한다.

  물론 죽음은 김혜순 시의 자양분이다. 그녀의 시는 죽음이 빗줄기로 강으로 양수로 흐르는 그 흐름으로 이루어져있다. 하지만 반대로 그녀의 시는 동시에 죽음의 집적체였다. 도망가려는 죽음을 내 몸에 가두기, 죽음으로 요리하기, 사랑하는 그에게 먹이기, 이런 카니발의 의식이 그녀의 시였으며 그녀의 세상 서울은 죽음이 집적되어 미로로 변하고 한 번 들어온 사람은 나갈 수 없는 무덤이 되었었다.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그 죽음의 길을 터트린다. 흐르고 싶은 그녀의 욕구는 죽음의 긴장을 생으로 바꾸고 싶어 어쩔 줄 모른다.


  너무 위태로워 오히려 찬란한

  빨간 피톨의 시간이 터지게 할래


  네 꿈의 한복판

  네 온몸의 숨이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그곳

  그곳의 붉은 파도 자락을 놓지 않을래


  내 밖의 네 안, 그곳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래

                                                       「붉은 장미꽃다발」부분



  내 주먹 속 작은 마침표 하나

  내가 내 심장의 안전핀을 뽑아 움켜쥔 점 하나

  …(중략)…

  밤을 수축시켜 제 그림자에 가둔 전구의 필라멘트를

  움켜쥔 것처럼 뜨거워, 앗 뜨거, 견딜 수가 없어

  피를 가득 머금어 드디어 정신이 나가버린

  내 심장을 더 이상 이렇게 가둘 수는 없어

                                                  「움켜쥔 마침표 하나」부분


  거기에서 그녀는 흘러내린다. 물론 존재는 흘러내리고 싶어한다. “여기 있으면서 저기로 가고 싶은” 욕구이다. 물은 고여 있으면 썩고 남녀 간의 성적인 소통도 흘러내림이며 가장 생명력 가득한 행위인 수유도 흘러내림이며 만물의 생명 현상은 한 마디로 흘러가고 흘러옴이다. 그녀의 흐름은 길에서 시작되었다. 죽음이 집적되는 서울에 무수한 실핏줄의 길을 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 흘러감이 대상을 잃어버렸을 때 그 흘러감은 의미를 상실한다. 김혜순은 그 대상을 잃어버리고 자족적인 상태가 되어버렸다.

  슬픈 사랑기계는 달을 먹고 벌써 배가 불러 있다. 그녀 뱃속의 달은 익어가지 못하고 질질 흘러내린다. 그녀의 달을 익어가게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흐름이 아니라 잡아당김이다. 꾹 참음이다. 아무리 우주의 본 모습이 흐름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안에서 팽팽하게 잡아당김으로 만들어진다. 그것을 놓아버리는 순간 우리는 우주의 흐름으로 흩어져 무(無)의 영역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것은 다른 말로 죽음이다.

  그녀가 끊임없이 달력공장 공장장님을 찾았던 것은 그가 우주의 흐름을 주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매달린다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말씀을 조롱하고 넘어서는 것이 그녀의 구원이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하루 쉬셨다는 그 주일 지금도 기억나시나요?

  무슨 말씀은 꽃이 되고 무슨 말씀은 이 입술이 되던가요?

  이 입술을 벌려 하는 말 다 알아들으시나요?

  이 리듬, 이 비유, 이 시니피에 다 알아들으시나요?

  손가락 꼽아가며 스무고개 넘나드신 그 일주일간

  무슨 말씀 치밀어서 이 귀찮은 파리떼 만들었나요?

  그 몸, 그 팔다리, 그 입술 빚을 때 무슨 말씀 하셨나요?

  나처럼 보기에 좋았더라 하셨나요?

  이 몸은 누구의 죽음을 쪼개어 꺼낸 씨앗인가요?

  아니면 누구의 삶을 쪼개어 꺼낸 죽음인가요?

  당신의 말씀, 그 말씀의 세상 뒤로 나가면

  아니 그 교란의 거울 뒤로 나갈 수 있다면

  뭔가 있긴 있는 건가요?

  당신과 나의 스무고개 이제 지겹지도 않나요?

  절대로 한 가진 안 가르쳐주는 사람, 그런 사람을

  사람들은 아버지라 부르나요?

  그럼 어디 한번 나도 말하지 않아볼까요?

  우리가 방문을 닫고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말은 몸에서 나온 실타래처럼

  우리 몸을 칭칭 감아버리고

  어떤 말은 북극과 남극처럼 멀리멀리 헤어져

  어떤 말은 눈밭의 흰 토끼처럼 서로에게 보일 수 없었는지

  절대로 절대로 당신에게 말하지 않아볼까요?

  그렇게 입 다물고 있으면 우리도 당신처럼 아버지 되나요?

  그러니 나한테 박쥐가 내 잠 들여다보고 하는 것 같은

  그런 시시한 태초에 어쩌구 하는 말씀, 하실 생각이랑 꿈도 꾸지 마세요.

                                                「말씀」전문


  중요한 것은 그녀가 구멍을 즉 거울은 물로 채우고 그 물을 마셔버리는 것이다. 즉 자신이 몸을 물로 즉 슬픔으로 채우고 스스로 구멍이 되고 거울이 되는 것이다. 그 팽팽한 수면의 거울이 그녀의 시가 되어야 한다.

  김혜순은 죽음의 집적체가 가지던 그 긴장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다시 찬찬히 흘러내림의 대상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녀는 수도꼭지처럼 헐떡이고 있는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했다. 흐르고 싶어 하는 그녀, 우리는 그녀를 향해서 말하려 한다. 말씀의 그물에서 견고한 시의 실을 짜는 김혜순을 우리는 기억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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