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룩한, 시(꽃이며 상처이며 씨앗인)
강미정의 시집 『상처가 스민다는 것』에 대하여
강미정의 시집 『상처가 스민다는 것』은 꽃처럼 피어나는 상처에 대한 이야기이다. 상처는 꽃이며 꽃은 상처이다. 상처는 멍이 되고 주름이 되지만 동시에 몸 속에 길을 내고 무늬를 만들고 나아가 씨앗을 품는다. 상처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강미정의 시가 가지는 힘이다.
꽃은 삶에의 욕망으로, 사랑의 힘으로 핀다. 제비꽃만 생식중(「제비꽃 편지」)인 것이 아니다. 모든 꽃은 생식중이며 우리의 몸도 생식중이다. 우리의 몸은 어둠 속에서 불을 켜는 별과 같다.
꽃 피고 싶은 열망이 꽃을 피우는 것이다
꿈꾸며, 자꾸 빛나게 하며 주위를 흥분시키며
옆의 것을 또 그 옆의 것을 빛나게 하며
세상이 온통 저의 꿈으로 꽃피게 한다 우글거리게 한다
봐, 모든 꽃은 뜨거워, 뜨거워,
변화하고 싶은 것만이 변화를 가져 오는 것처럼
…(중략)…
모든 꽃피는 것은 지금도 꿈꾸고 있다
즐거운 어미를 기르고 있다
「즐거운 꽃」부분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꽃피는 자신의 몸을 인식하는 것이다. 자신이 여자인 것을 느끼는 것은 세상의 불평등이나 상대적인 결핍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인 깨달음이다. 여성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들어있는 자연의 힘을 인식하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이다. 그 몸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서 기다림의 길을 내고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로 꽃처럼 피어난다.
그러나 늘 우리의 삶 속에는 비가 내린다(「상처가 스민다는 것」). 당신은 나에게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 세상은 나와 어긋나기만 한다. 욕망의 결과는 상처이다. 그것은 주름이며 멍이며 패인 길이며 웅덩이이고 어둠이다. 나는 그 문 앞에서 피투성이로 쓰러진다. 자신의 욕망이 거미줄이 되어 나를 옥죄기도 한다. 거미는 흔들리며 헝클어지는 고통을 먹고 흔들리는 고통은 늘 배가 고프다(「거미줄」). 사랑의 힘으로 피어나는 꽃은 상처로 변한다. 꽃의 무늬는 패인 웅덩이가 된다. 웅덩이는 세월의 길에 새겨진 꽃이고 그대를 향해갔던 나의 길이며 지금도 나를 앞서 가는 길이다.
가슴 그 어디쯤에도
길이 패이고 웅덩이가 깊어지는 곳이 있다
이 깊게 패인 곳에 머무는
머뭇거린 마음이 길이 되기도 한다
성난 빗물만 살고 있다는
그대의 가슴에 닿고 싶어서
아픈 내 눈이 그대에게로 넘쳐흘러간 것처럼
한번도 그대의 가슴 쪽에 이르지 못해
내 가슴 오래 아팠던 것처럼
오래 앓아 누웠던 시간이 길이 되기도 한다.
…(중략)…
가슴 한 쪽이 몹시 쓰리다거나
그립다거나 하는 말들이 무수히 생겨나
사랑한다 말하는 그대가
움푹움푹, 패인 길이 되기도 한다
「움푹 패인 길」부분
사랑하는 그대가 오히려 나에게는 움푹 패인 길이며 상처가 되는 것이다. 멍은 아픔이 파랗게 꽃피어난 것이다. 나의 모서리가 너를 아프게 하고 너의 모서리가 나를 아프게 한다. 우리는 자신의 모서리를 몸 속에 넣어 그 끝을 닳게 하면서 솟아나는 아픔을 내 몸 속에 가둔다. 그것이 멍으로 파랗게 피어난다(「멍」). 상처의 꽃은 내 몸 속에 길을 내고 무늬를 만든다. 주름살은 시간의 상처가 내 몸에 새겨진 것이다.
제 몸 속에 파문을 새겨 넣은 나무처럼
떨림은 둥근 무늬를 지니고 있다
쉼 없는 파문을 움켜쥐고 있다
어깨를 떨며 울었던 상처의 옹이마다
아픈 몸을 누인 슬픔이
둥근 눈물로 쏟아지는 것도
몸 속으로 새겨 넣은 물무늬 때문이다
마음 한가운데를 움켜쥐고 있는 파문 때문이다
삶은 떨림의 한가운데를 움켜쥐고
둥근 파문으로 기억될 것들을 키우는 곳,
움켜쥐었던 파문을 놓아 버리면
한꺼번에 닥칠 커다란 떨림으로 몸 가누지 못할까봐
꾹꾹 가슴으로 물무늬를 삼켜 낸 사람의
얼굴에서 물무늬로 무늬지는 시간을 읽는다
오랜 여운으로 깊고 둥글어지는 떨림,
파문을 잡아낸 인생만이 둥글어진다
「주름」부분
“한꺼번에 닥치는 커다란 떨림”을 견디게 하는 것은 스스로의 몸에 새긴 “파문”이다. 강미정은 상처의 시간을 견딘다. 칼날에 손 베이면서도 그 고통의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운다. 나아가 자신의 삶을 지탱해온 밥 한 그릇이 손 베이는 상처라는 것을 깨닫는다(「손을 베이다」). 싸우고 나와서 앉아있는 남의 집 창문 밑에서 어느 여인의 울음소리를 듣고 밥 끓는 냄새를 맡으면서 집에 돌아가고 싶은 삶에의 욕구를 느낀다(「밥물 끓는 냄새」). 그녀는 눈물의 힘으로 똑바로 서려는 촛불과 같다(「몹시도 아픈 수십 번의 눈물」). “파릇한 상처를 밀어 올리며 당신 꽃피었다”(「상처가 스민다는 것」). 사랑은 “가슴 속 상처가 스민 그 자리에서/ 길을 더디게 걷는 일처럼/ 소리도 없이 서로 스미려”는 것이다. “당신을 새겨 넣은 내 푸른 상처는” “오래도록 파닥이며 반짝”(「상처가 스민다는 것」)인다. 상처의 몸은 뜨겁고 지독한 냄새(「지독한 냄새」)가 나며 늘 흔들린다. 상처는 끝나버린 것이 아니라 늘 살아서 움직이고 욕망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처의 힘으로 산다.
강미정이 상처에 새기는 무늬는 독(毒)이 만들어내는 발효의 힘이다. 제비꽃의 “저 파열하는 자줏빛 몸부림도/ 고단한 뿌리가 가졌던 일그러진 얼굴이었음을”(「모든 꽃은 흔들리며 뿌리로 간다」) 그녀는 안다. 그녀는 독 속에서 독을 견딘다. 울음과 함께 놀고 울음을 위로하고 울음과 함께 잠드는 것이다. 이렇게 나를 발효시키는 것은 어머니이다(「독」). 어머니는 그 자체가 상처의 덩어리이며 웅덩이며 늙고 요염한 살구꽃이고 그녀를 발효시키는 독이다. “수만 갈래 찢어진 물결을 쓸어 담으며/ 자신의 망망대해를 건너는/ 상처투성이의 어머니,”(「기도, 망망대해」)이다. 나도 어머니로 “발효되”어 지독한 밥 냄새를 풍긴다(「지독한 냄새」). 발효된다는 것은 내가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꿈꾸는 내부는 뜨겁고 뜨거운 내부는
빛이 나고 빛나는 것이 꽃으로 핀
모든 꽃은 뜨거워, 뜨거워,
꿈꾸는 씨앗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온갖 부푼 꿈의 어미가 되고 싶은 것이다
「즐거운 꽃」부분
어머니가 된 나는 상처를 향해 고맙다는 말을 무수히 되뇌이며(「고마워요」) 절을 한다(「절하는 남자」). 고맙다는 말과 절을 하는 행위는 세상의 상처에 대해 상처의 본질을 내파하면서 맞서는 것이며 “지쳐 쓰러지며 둥근 꽃 한송이를 피우”는 것이다. “쓰러진 자리 수많은 꽃망울이 푹죽처럼 터지고 있다”(「절하는 남자」). 그것이 그녀가 상처를 안으로 품는 방식이다. “지금 이 시간,/ 사랑하는 일 말고 다시 또 무엇을, 무엇을 먼저 하겠”(「고마워요」)는가. 그녀는 “내 사랑을, 다시 한 번 써볼 참이었다 삶이 어긋남으로 다 흘러가기 전에 하나의 꽃이 하나의 향기를 뛰어 넘어 가는 것처럼, 뾰족한 삶을 둥근 사랑으로 훌쩍 뛰어넘고 싶었”(「침묵, 내 사랑」)던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제 속에 새 마디를 하나 새겨 넣는”(「상처가 스민다는 것」)다. 어미가 된 그녀의 눈에 이제 새롭게 피어나는 봄은 “새로 돋은 아픔”이다.
올해 새로 돋은 저 눈부신 햇빛,
맨발로 뛰쳐나온 그 여자 울던 자리에
폴짝폴짝 깨금발로 뛰어온 아이 꼬옥 안고
한참을 그렇게 서있던 그 자리에
새로 돋은 연초록 나뭇잎 사이로
포롱 포르롱 내려와 연신 꽁지깃을 까딱거리네
아이 손잡고 들어간 저 맨발의 여자도
올해 새로 돋은 아픔을 걷는 것이리
…(중략)…
수만 갈래로 갈라지며 부딪히며 내게로 왔던
올해 새로 돋은 저 눈부신 아픔,
「햇빛 구경」 부분
울음 울던 여인인 아이를 안고 저 있었던 그 자리에 상처의 꽃처럼 연초록 나뭇잎 돋아난다. 그 눈물의 꽃은 햇빛에 눈부시게 반짝인다. 시간이 그 길에 상처를 내는 것은 사랑 때문이다. 사랑의 본질은 흔들림이다. 그래서 꽃은 흔들린다. 흔들림은 존재 그 자체의 넓이로 여울을 만든다. 흔들리지 않고는 어디에도 이를 수 없다(「모든 꽃은 흔들리며 뿌리로 간다」). 그리고 사랑은 눈부시다. 그 눈부심이 눈물의 번들거림일지라도.
어미의 몸은 상처투성이다. “빛을 담기 위해선 어둠도 담아야 한다는 것을”(「떨림-그대에게」) 어미의 몸은 안다. 우리는 욕망하고 그리고 사랑한다. 사랑하는 당신을 향해 길고 긴 기다림의 길을 만들고 그 길은 깊이 패인 웅덩이이다. 그녀는 그 웅덩이로서의 어머니를 견딘다.
웅크리고 앉아 빨래를 하며 울던 여자처럼 비는 지나간다
움푹 패인 곳마다 물이 고인다
평생 엎드려 물을 퍼내 준
가슴을 들여다 보는 일은 아프다,
움푹움푹 패인 곳 뿐인 어머니
패인 곳마다 빗물을 담는다
-어제 너는 이 빗물을 빨아먹었어
-젖꼭지에 닿는 부드러운 너의 입술은 힘찼지,
나는 저 움푹한 곳을 뚫고 나온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어머니를 푸르게 뒤덮었던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이제 너무 패여 커다란 웅덩이처럼 캄캄해진
어머니를 더 바라 볼 수가 없다
어두워지지 않을 어머니의 냄새 속에서
평생 물을 퍼내 준 어머니 속에서
나는 무성 무성해진다
「어머니를 견딘다」부분
나는 어미의 움푹 패인 곳을 뚫고 나왔다. 어미의 웅덩이는 너무 패여 캄캄한 어둠이다. 우리는 모두 그곳을 지나왔다. “그 무엇에도 도망하지 않고 사랑에 열중했던”, “아직도, 알아들을 수 없는 뜨거움으로 살고 있는/이 곳의 얼음같이 찬 상처의 시간 사이로” “얼굴을 부비며” 지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나 스스로가 어미의 상처이며 꽃이며 씨앗이다. 그 어미의 냄새 속에서 나는 무성하게 피어난다. 그리고 스스로 어미가 되어 씨앗을 맺는다.
뱃속에 이렇게 많은 알이 슨 것을 보니, 죽어서도 눈감지 못하고 뚜룩뚜룩 쳐다보는 것을 보니, 몸 속, 무늬가 졌겠어, 아득하고 아득해져서 깊은 길이 났겠어, 생선 배를 가르며 하시던 어머니 말씀이 생각났다
…(중략)…
그래서 봄만 오면 바람이 단가, 살갗이 툭툭 갈라지며 저렇게 꽃이 피고 몸 속, 지울 수 없는 무늬가 지는가, 배가 불룩해지는가,
목이 메어왔다
「불룩한, 봄」부분
강미정의 『상처가 스민다는 것』에 담겨있는 시들은 상처이며 꽃이며 씨앗이다. 그 모두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어미의 몸뿐이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의 시들은 어미의 몸처럼 불룩하다. 무수한 씨앗을 담고 있다. 그 씨앗의 발아를 지켜보는 기쁨을 우리는 맛보게 되리라.
날아가거라 더 멀리 날아가서 어미가 되거라
날아간 길을 애지중지 하는 어미의 시간은
언제나 어느 곳에나 뜨거움이다
다 자란 몸이 남은 몸을 쓰러뜨리며
걷잡을 수 없이 빠져나간 빈 껍질마다
어리고 어린 시간을 채운 어미여,
「아름다운 허물」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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