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으로 난 길을 걸어서 도달한 시의 허공
- 오규원의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에 대하여
오규원의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는 읽으면 대단한 뭔가를 바라지 않고 그냥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시집이다. 이 시집 속에서 물물과 나와의 관계는 너무나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물물과 나 사이에 존재하던 긴장들을 천천히 풀고 있다. 그래서 오규원의 이 시집을 읽다보면 내가 단순하고 투명해지면서 지금 이 곳 “사람의 집”(「물물과 나」)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볍게 날아가는 느낌이 든다. 그 세계는 ‘물물’과 ‘시간’과 내가 조용히 흔들리고 있는 곳이다. 그러면 이 시집의 무엇이 우리를 그런 세계로 이끌어가는가.
1. 보는 자로서의 시인, 그 투명한 눈
오규원의 이번 시집에 실려있는 시들을 비롯해서 그의 이후 시들의 제목은 대부분 사물의 이름 즉 명사이거나 사물과 사물을 ‘와/과’로 연결한 형태이다. 이 시들은 사물을 보는 이의 진술이다.
나는 지금 시를 쓰고 있지 않다. 나는 안락의자의 시를 보고 있다.
「안락의자의 시」부분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드러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보거나 느낀 그대로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도 강력한 것이다. 시인들의 시가 투명해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인간의 관념에 지배되지 않는 맨눈으로 본 그대로를 진술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우리의 눈은 이미 관념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또 설사 관념을 벗어나서 본다 하더라도 그 본 것을 표현하는 언어가 관념덩어리인 것을.
오규원은 지금까지 얼마나 시인이 맨눈일 수 있는가를 시험해왔다. 그것을 위해 그는 몇가지 전략을 동원했다. 첫 번째는 원근법이 도입되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원근법으로 왜곡되기 이전의 감각이다. 본래 원근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들과 원시인의 맨눈은 원근법을 무시한다. 원근법이란 시각 이외에 다른 감각들과 관념이 보태어지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의 시각은 본래 평면적이다. “새가 푸른 하늘에 눌려 납작하게 날고 있다”(「하늘과 돌멩이」). “담의 끝까지 간 담쟁이가/ 불쑥 몸을 드러낸 하늘 앞에/ 전신이 납작해져 있다”(「하늘」).
이 보는 자로서의 시인의 눈에는 자기 자신 또한 사물로서 보인다. 이 납작한 그림 속에서 시인은 한 ‘사나이’이다. 사나이는 새와 같이 길을 가기고 하고 안개 속에 지워지기도 하고 부처처럼 혹은 잠자리처럼 마르기도 한다.
올라온 안개가 망초를 지우더니
곧 나의 하체를 지웠다
하체 없는 나의 상체가
허공에 떠 있었다
나는 이미 지워진 두 손으로
지워진 하체를 툭 툭 쳤다
지상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강변에서 툭 툭 소리를 냈다
「안개」부분
이 세계에는 중력까지도 우리의 세계와 다르게 적용된다. 길이 들리고 집이 들린다(「하늘과 집」). 그것을 지긋이 누르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는 우리의 눈이 만들어내는 관념의 무게였다면 그의 시 속에서는 맨눈에 보이는 다른 사물들이다.
사방이 몸을 비워놓은 마른 길에
하늘이 내려와 누런 돌멩이 위에 얹힌다
길 한 켠 모래가 바위를 들어올려
자기 몸 위에 놓아두고 있다
「하늘과 돌멩이」부분
그리고 오규원은 자신이 만들어낸 풍경이 언어의 틀로 되어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가 원근법 대신 자신의 눈에 걸친 것은 언어라는 안경이다. 그는 문득문득 그 틀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림 속의 풍경들 속에는 젖는 것도 있고 젖지 않는 것도 있다. 그리고 그 풍경을 담고 있는 언어, 시도 젖지 않는 것이다.
토마토와
나이프가 있는
접시는 편편하다
접시는 평평하다
「토마토와 나이프- 정물 b」부분
보이는 접시는 평평할 수도 있고 편편할 수도 있다. 같은 사물에 대한 같은 느낌이 어떤 언어로 표현되느냐에 따라 두 가지 사물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접시 위에 놓여있는 것이 딸기이기도 하지만 한 줌의 우툴두툴함으로 시인에게 느껴지기도 한다. 시인의 눈에 얹힌 언어가 그 사물을 둘러싸는 것이다.
2. 인과율을 벗어버린 인과율의 세계
오규원은 자신의 세계에 인과율을 새롭게 정립한다. 그의 시 속에 각각의 사건들은 인과율로 맺어져 있지 않다. 그보다는 나열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자연을 바라볼 때 각 현상들의 인과관계를 따지려 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자연을 인식한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그 현상들을 왜곡하게 된다. 오규원은 각각의 현상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보이는 그대로 인과관계를 정리한다.
칸나가 처음 꽃이 핀 날은
신문이 오지 않았다
대신 한 마리 잠자리가 날아와
꽃 위를 맴돌았다
칸나가 꽃대를 더 위로
뽑아올리고 다시
꽃이 핀 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다음날 오후 소나기가
한동안 퍼부었다.
「칸나」전문
칸나가 핀 것과 신문이 오지 않은 것은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나 그 두 개의 현상을 연달아 일어나고 그래서 시인은 단순하게 그것을 연결시킨다. 그 두 현상은 연결이 되어도 그만이고 안 되어도 그만이다.
토마토는 있다
세 개
붉고 둥글다
아니 달콤하다
그 옆에 나이프
아니 달빛
「토마토와 나이프- 정물 b」부분
새로운 인과율의 고리를 만드는 것은 접속사들이다. ‘아니’가 주는 긴장감, ‘그리고’가 주는 편안함이 사물들과 현상들의 새로운 관계를 이룬다.
식탁 위 과일 바구니에는
주렁 두 개와
둥글 셋
그리고
우툴 한줌
「식탁과 비비추-정물 a」부분
그것은 ‘사이’이다.
덜자란 잔디와 웃자란 잔디 사이 웃자란 잔디와 명아주 사이 명아주와 붓꽃 사이 붓꽃과 남천 사이 남천과 배롱나무 사이 배롱나무와 마가목 사이 마가목과 자귀나무 사이 자귀나무와 안개 사이 그 안개와 허공 사이
오늘과
아침
「오늘과 아침」부분
그 사이에 시간이 스며있다. 그 사이는 사건들 사이에도 존재한다.
장미를 땅에 심었다
순간 장미를 가운데 두고
사방이 생겼다 그 사방으로 길이 오고
숨긴 물을 몸 밖으로 내놓은 흙 위로
물보다 진한 그들의 그림자가 덮쳤다
그림자는 그러나
길이 오는 사방을 지우지는 않았다
「사방과 그림자」전문
위시의 진한 글자로 된 부분은 각 사건들을 연결되는 언어의 끈이다. 이 언어의 끈으로 연결된 사건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인과관계로 본다면 연결이 될 수 없다. 것이다. 이 사건들의 나열은 시인의 눈에 들어와 인식된 순간들의 나열이다.
그렇게 해서 ‘시간’이 생겨난다. 이 시집 속의 시간은 별개의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시간이다. 보면서 혹은 인식하면서 시간이 생겨난다. 나와 물물의 관계는 시간이다.
밤새 눈이 온 뒤 어제는 지워지고 쌓인 눈만 남은 날입니다
쌓인 눈을 위에 얹고 物物이 허공의 깊이를
물물의 높이로 바꾸고
나뭇가지에서는 쌓인 눈이 눈으로 아직까지 그곳에 있는 날입니다.
「물물과 높이」부분
위의 시에서 ‘어제’라는 시간은 사라지고 ‘아직’이라는 시간은 남아있다. ‘어제’라는 시간은 ‘허공’을 ‘눈’이라는 물물의 높이를 바꾸었고 ‘아직’이라는 시간은 ‘눈’이라는 물물을 ‘눈’으로 남아있게 한다.
7월 31일이 가고 다음날인
7월 32일이 왔다
7월 32일이 와서는 가지 않고
족두리꽃이 피고
그 다음날인 33일이 오고
와서는 가지 않고
두릅나무에 꽃이 피고
34일, 35일이 이어서 왔지만
사람의 집에는
머물 곳이 없었다
나는 7월 32일을 자귀나무 속에 묻었다
그 다음과 다음날을 등나무 밑에
배롱나무 꽃 속에
남천에
쪽박새 울음 속에 묻었다
「물물과 나」전문
위의 시에서 물물과 나의 관계는 곧 시간이 된다.
3. 사방으로 난 길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세상은 단순히 고정된 정물은 아니다. 그 속에서 물물들은 무수한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그 현상들은 이어진다. 그 움직임과 이어짐은 길로 나타난다.
길이 끊어진 곳에 멈추어
서 있는 길이 있습니다
서 있는 길과 마주보며 집이
한 채 있습니다 서 있는
길을 보며 집이 앉아 있습니다
지붕에는 날개가 있는 새가
앉습니다 새가 간 뒤에 지붕은
이번에는 오로지 지붕이 됩니다
지붕과 창으로 이어지는 길은
햇빛이고 방으로 이어지는 길은
어둠입니다
「지붕과 창」부분
길은 끊어지지 않는다. 아니 끊어지고 또 무수히 생겨난다. 물물의 연결도 현상의 연결도 혹은 현상 자체도 시간의 흐름도 심지어 시(詩)도 길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장미를 땅에 심었다
순간 장미를 가운데 두고
사방이 생겼다 그 사방으로 길이 오고
「사방과 그림자」부분
“코스모스는 꽃을 들고 바람을/ 타고 다닌다” 그러면 “몸은 가운데 두고/ 꽃을 흔들리는 사방에 있”(「돌」)게 된다. 꽃은 그 자리에 있으면서 동시에 사방에 있다. 존재가 생기고 그 배경이 되는 사방이 생기고 그 사방은 길 곧 관계가 된다. “길에 매달려 호텔이 있”으며 온몸으로 길이 되는 “강은 호텔 뒤에서/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기도 하고 “안개가 되어/ 물의 힘으로 호텔을 하얗게 지웠다 다시 세”(「호텔」)우기도 한다.
사방으로 길이 온다면, 즉 그 존재에게 오는 길이 무수히 많다면 그것은 길이면서 동시에 더 이상 길이 아니다. 그것은 무한대이며 허공이다.
허공에서 생긴
새들의 길은
허공의 몸 안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몸 안으로 들어간
길 밖에서
다른 새가 날기도 하고
뜰에서
천천히 지워질 길을
종종종
만들기고 합니다
「새와 길」전문
위시에 새가 가는 길은 존재이며 허공이다.
원근법과 인과율을 벗어버린 오규원의 새로운 눈은 현상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래서 물물들의 존재와 비존재를 한꺼번에 본다. 매달려 있는 열매와 그 열매가 떨어지고 난 뒤의 빈자리를 한꺼번에 본다. 시간마저 하나의 사물로 보기에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 빈자리마저 가지에 매달려 있다(「들찔레」). “들찔레가 길 밖에서 하얀 꽃을 버리며/빈자리를 만들”(「하늘과 돌멩이」)고 있다. 시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이제 꽃이 지는 것이 아니고 빈자를 만들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막혀있는 것은 어둡지만 동시에 환하다(「골목1」).
밤이 세계를 지우고 있다
지워진 세계에서 길도 나무도 새도
밤의 몸보다 더 어두워야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중략)…
산 위에까지 구멍을 뚫고
별들이 밤의 몸을 갉아내어
반짝반짝 이쪽으로 버리고 있다
「밤과 별」부분
위의 시에 드러난 세계는 대칭을 이루고 있다. 우리의 세계는 밤이 되어 어두운데 그에 대칭이면서 동시에 그 세계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는 더 어두워져서 물물들을 드러낸다. 그리고 별들은 밤의 몸을 갉아내고 구멍을 내어 그 어둠을 이 세계에 버림으로서 반짝거려 그 존재를 드러낸다. “노란 꽃이 사라진 자리에” “붉은 열매”가 맺히듯이 “열매가 사라진 자리에는 허공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으며 “콩새 한 마리”는 “몸을” “하늘에다 깨끗이 지우”(「물물과 높이」)기도 한다.
흔한 꽃 몇몇이
피다가 멈추고 피다가 멈추며
꽃 질 자리를
감추고 있습니다
감추고 있는 그곳까지
감추어질 길이 있습니다
「지붕과 창」부분
시인의 눈은 점점 깊어져 물물들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그림자를 보고 그리고 그 배경을 보고 그 배경의 한없는 깊이를 본다. 그리고 물물들이 오종종거리며 가는 길은 사실 그 배경과 다르지 않음을 본다.
오규원의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에는 원근법과 인과법칙이 사라지고 없다. 허깨비처럼 존재하면서 우리의 눈을 가로막던 그것들이 사라지자 물물들은 투명한 본래의 모습을 명랑하게 드러내고 있다. 시인도 그 안에서 하나의 물물로서 투명하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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