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고

길 위의 언어

선인장아니면무엇? 2011. 6. 18. 14:46

 

길 위의 언어

  -오규원의 시세계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시지프스는 신을 속인 죄로 벌을 받게 된다. 그는 어떤 면으로는 인간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인간은 신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 눈을 피해가면서 항상 나름대로의 존재가치를 가지려고 한다. 그것이 신에게는 사기로 비춰질 것이다. 신이 짐 지워준  운명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고 또한 그 답을 만들어가는 인간은 결국 신을 속이는 사기꾼인 것이다. 그 시지프스가 신으로부터 받은 벌은 돌을 짊어지고 산을 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산꼭대기에 도착하면 그 돌은 다시 굴러 떨어진다. 그러면 시지프스는 산 밑으로 내려가 다시 그 돌을 짊어지고 산을 올라야하는 것이다. 시지프스가 받은 벌은 한 마디로 ‘허무’이다. 아무 의미없는 노동을 계속 해야하는 것. 아무 보람없는, 끝없이 계속되는 일 즉 의미없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이 시지프스, 나아가 인간이 신으로부터 받은 벌이다. 그러나 카프카는 이 슬픈 「시지프스의 신화」를 여기서 끝내지 않는다. 카프카의 글에서 시지프스는 그 허무한 노동에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하여 이 고달픈 노동의 길은 이제 달라진다. 즐거울 때도 슬플 때도 있다. 그 굴곡진 길을 우리는 가게 되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는 일종의 시지프스의 고행이다. 우리는 커다란 돌을 짊어지고 끝없이 길을 가는 것이다. 그 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신의 몫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몫이다.

  그 길은 또한 시간의 길이다. “이천 년을 밟고/ 발밑의 이천 년/ 樓蘭을 밟고 낙타가 간다”(「누란」). 생명의 연장은 시간의 문제이다. 사실상 시지프스가 그 고행의 길에 부여했던 의미란 시간이다. 쉼 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에 마디를 나누고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단다. 아니 그렇게 해서 시간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인식되고 의미가 생기는 것이기도 하다. 스스로 만든 그 시간이라는 길을 우리는 간다. 그 길 위에 앉아 잠시 쉬기도 하고 ‘과거’라는 시간을 뒤돌아보기도 한다. 오늘이라는 시간, 현재라는 시간은 그렇게 해서 생겨난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길을 가는 것이다. 아니 가만히 서 있는 내 옆을 시간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고 어제가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멀찍이서 오고 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숲속을 서성거리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밤이라는 시간이다.

  우리가 시간의 길을 인식하는 것은 언어를 통해서이다. 시지프스의 길의 의미를 우리는 언어로 인식한다. 혹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그 돌덩어리는 언어가 아니었을까? 혹은 우리에게 그 돌덩어리를 짊어지게 한 것은 신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아닐까. 이미 우리는 그 돌을 짊어지고 너무 먼 길을 왔고 지금도 가고 있다. 우리가 가는 그 길목마다 ‘허무’라는 괴물이 시커먼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지만 우리는 그 괴물을 피해서 길을 꺾으며 끊임없이 그 시간의 길을 가는 것이다.

  오규원의 시는 그 길 위에 혹은 길밖에 있다. 그의 시로 가는 문은 어디에 있을까? 혹 우리가 길을 가다 마주치는 길가에 핀 저 꽃이 그 문은 아닐까? 오규원의 시는 이 시간의 길과 언어의 길이 씨줄과 날줄로서 만들어내는 무늬이다. 시의 길은 언어로 이루어져있다. 지금 나는 오규원의 시의 길을 따라가려고 한다. 가다가 무엇을 만나게 될까? 그 길 위에는 벤치가 있고 소년이 있고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가면서 나는 돌멩이를 차기도 하고 꽃을 보기도 하고 앞서 가고 있는 오규원의 그림자를 밟기도 하고 비바람을 만나기도 할 것이다. 길의 끝에는 집이 있고 그 집을 나서면 또 새로운 길이 시작될 것이다. 집이란 작은 죽음이며 그 죽음을 통과하고 나면 또 다른 길이 우리 앞에 펼쳐지리라. 우리는 그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을 가지고 있는 집을 만나게 될 것인가. 혹은 없는 문을 찾기 아니면 문을 지우기, 그것이 오규원의 시를 읽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는 없을까? 꽃은 그 식물의 다음 생을 열고 가는 문이다. 나 또한 그 꽃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 꽃이 어떻게 개화하는지, 그 만개한 모습은 어떤지, 그리고 나아가 그 장미가 어떻게 조용히 허공 속에 묻히는지.


  1. 시간이 서성이는 길 위에서


  길은 집에서 시작되고 집에서 끝난다. 길은 운명이기도 하고 의지이기도 하며 궁극적으로 실존이다. 혹은 배때기로 긴 자국이 지나고 나면 길이 되기(황지우)도 하며 또한 배가 지나간 바다 위의 길이나 새가 날아간 허공의 길처럼 길은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길은 떠남에 의미가 있고 집이라는 안온하고 따스한 그리고 내 존재의 본질이었던 곳을 떠나서 떠도는 데 의미가 있다. 그 길은 “질퍽거리는 난장의 길”(「저 여자」)이지만 “내가 가며 닦는”(「명동2」) 길이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살아있음의 병의 앓는다.


  이 거리에서 나는

  살아 있어 병이 깊다

  병이 깊은 이곳에서

  네가 아프지 않으면

  누가 아프겠는가

  내가 아플 때 그대 병이 깊지 않으면

  그대 무엇이 깊겠는가

  거리의 이 우리들 찬란한 유희 앞에서

                                     「비밀-순례14」전문


  오규원의 시는 우리에게 늘 길을 보여준다. 스스로 길을 가면서 길 위의 혹은 길 밖의 세상을 보기도 하며 혹은 길 위에 조용히 멈추어 서서 또는 길과 그윽히 떨어진 거리에서, 집 안에서 길을 바라보고 있다. 길을 본다는 것은 길 위에 있는 것, 혹은 길 안에 있는 것을 본다는 것이고 나아가서 길 밖을 본다는 것이며 나아가서 길을 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비 속으로 사람들이 지나간다

  비 속에서 우산으로

  비가 오지 않는 세계를 받쳐들고

  오, 그들은 정말 갈 수 있을까.

                                    「비가 와서 이제는-순례13」부분


  그 길 위에는 나만이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길 위의 모든 것이 길을 가고 있으며 하늘의 새들은 “잔가지 사이로 길의 부리를 묻”고 있다. 혹은 길이 길을 간다. “그물에 걸린 길만 생선처럼 퍼덕”(「적막한 지상에-순례2」)이고 “흩어지고 있는 길이 우리를 자주 어리둥절하게”(「아무리 색칠을 해도-순례4」)하기도 한다. 우리는 길 위에서 “여문다”.


  돌멩이 하나도 여기 길목에서

  福者로 여무나니


  길에서나 길 밖에서나 마땅히

  너는

                              「너」부분


  “우리는 길 위에 서서 길의 허리를 풀고 있다”(「길목-사랑의 감옥」). 길을 가는 것은 길의 매듭을 푸는 것이다. 그것은 먹고 살기 위해서다. 오규원의 시 속에의 인물들은 누구나 길을 가거나 길에서 헤맨다. 순례중이기도 하고 삶의 방편으로 떠돌기도 하고 허연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장거리를 헤매기도 한다. 배추장수의 삶의 수단인 배추를 뜯어내고 나면 시든 배추잎이 남아있는 지상의 길만이 남는다. “시간은 이곳의 배추잎 같겠지만 배추잎이/없으면 시간도 보이지 않”(「길목」)는다.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사라지고 없는 산의 길을 불러모”(「空山明月」)으기도 하며 “보이지 않는 길이 밑에서 잡”(「무덤」)기도 한다.


  나 혼자 다시 보누나

  언덕에서 떠난 자들이 떠나다 남긴 길이

  저희들끼리 엉키고 무너지는 한 세기를

  저희들끼리 몸을 섞고 가는 이 밤의 별빛 아래서

                                                    「마지막 웃음소리-순례8」부분


  사람은 떠나고 길만 남는다. 어디에나 길은 있지만 시인은 숨어 흐르는 물소리를 따라간다. 물의 길은 오규원이 늘 따라가는 길이다. 그래서 그는 늘 강가에서 서성인다. 길은 강으로 나뭇가지로 변형되기도 한다. 나무를 비롯한 생명들은 “살아 있는 그 맹목 육체의 길”(「아카시아」)이다. 또한 길들이 만나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한다. “길은 사람을 다치기 싫어/ 자꾸 구불거린다”(「젖지 않는 구두」). 그대 향해서 애달프게 달려가고 있는 내 사랑도 길이며 절〔寺〕이며 말〔言〕이다.


  사랑이여, 길인 사랑이여, 길의 끝에서

  만나는 섬의 심장이여, 말보다 먼저 지어놓은 절이여

                                        「명동4」부분


  길은 사랑이 되고 물길은 섬의 심장을 만나고 그 끝에 마음의 절을 지어놓는다. 어쩌면 길이 시작되고 길이 끝나는 집마저도 길의 한 모습이 아닐까? “집이란 때로 너무 가벼워서/ 돌로 눌러두고 다녀야 하는 길이”(「따뜻한 그늘」)기도 하다. 집마저도 길에 의해 들리고 길 떠나려 한다. 그 가벼운 길은 인간의 마을에 있다. 인간의 마을에는 길 떠나고 싶으나 떠나지 못 하는 아니 떠남을 잊어버린 집들이 있다.

  인간의 마을로 난 길에는 간판이 많다. “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 우리는 늘 길을 가면서도 집을 만나서 문을 열고 들어가 쉬고 싶다. 물론 길을 멈추는 것은 죽음을 뜻하지만 집은 그 잠시의 죽음이며 휴식이다. 간판은 문 옆에 혹은 위에 달려있으면서 우리에게 그 집에 대한 정보를 주지만 그 언어는 왜곡되어있다. 집보다 간판이 더 크고 더 많은 길은 우리를 소외시킨다. 간판이 많은 길이란 언어로 도배되어있는 길이다. 그 길에서 “더러는 문이란 문 모두가 간판”(「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이다. 이런 문은 집의 의미를 왜곡하고 문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우리는 간판(언어)의 지배를 받는다. 간판이 있는 곳에는 무엇이 있기 마련이고 간판이 많은 집은 수상하다.

  우리를 소외시키는 이 길은 사실 시간의 길이다. 우리를 소외시키는 것은 시간이다. 우리의 생로병사도 만남도 이별도 기쁨도 슬픔도 시간이 만들고 부수는 것이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 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비가 와도 젖은 자는-순례1」부분


  오규원은 관념들을 부활시켜서 생명을 준다. 시간이 길을 가고 죽음이 움직이고(「기댈곳이 없어 죽음은-순례3」) 절망이 살아있다(「아무리 색칠을 해도」). 이들은 모두 길을 가는 주체들이다. 이 길은 시간이 가는 길이다. 내가 주체가 아니라 시간이 주체이다. 나는 시간에 끌려다닌다. 길 위에 우리는 없고 시간만이 서성이고 있다. 시간이 집을 나서 길 떠나고 지친 모습으로 다시 문을 두드린다. 그 도중에 들길을 지나고 물과 같이 흘러 강을 이루기도 하고 숲 속을 헤매기도 한다. 그리고 인간의 마을을 지나기도 한다.


  눈이 저렇게 내려도 눈과 눈 사이로 다니며 갈 길을 가는 시간과

 

  눈이 저렇게 깔려도 미끄러지지 않고 늠름하게 서산을 올라가는 시간과


  눈이 저렇게 쌓여도 제 발자국을 지우고 인간을 자기 뒤에 남기는 시간과


  발맞추어 다시 그런 시간의 반복되는 행진을

  그리고 그리고로만 발맞추는 사람을 빠져나와

  고독하게 길 위에 발자국을 찍는 시간과

                                           「행진」전문


  우리 옆을 스쳐지나갈 때 시간은 언어의 옷을 입고 있다. 시간과 우리가 만나는 곳은 언어의 자리이다. 시간은 언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온다. 그러므로 시간의 길은 곧 언어의 길이다. 길이라는 언어 위에 우리는 언어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아니 언어가 곧 길이다. 생명의 본질이 길을 가는 것이고 그 본질은 언어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당신의 몸은 말이다”(「당신의 몸」). 너에게로 가는 길은 말을 따라 나있다. 말 옆으로 길은 새로운 가지를 낸다.


  -만남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너는 자꾸 만나자고 한다.


  나를 만나려거든

  나 대신 그 낱말이 있는 곳에 가보라.

  차라리 그 낱말을 따라

  다른 길로 가보라.

                        「만남이 무엇인지도 모르고-순례17」전문


  “개울가에서” “피 묻은 자식의 옷을 헹구고”, “두 손으로 달의 물때를 벗기”고 “몸을 씻기”고 “돼지 죽을 수고 장독 뚜껑을” 열고 “손가락을 쪽쪽 빨며 장맛을 보고 이불 밑으로 들어가서는 사내의 그것을 만지는” 그 여자의 손은 “그렇다-언어이리라”(「손-김현에게」). 너는 말이며 나의 존재이유도 말(「세헤라쟈드의 말-「千一夜話」별곡」)이고 내가 가는 길도 말이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순례1」부분


  우리는 말의 이름으로 멈추고 그 이름으로 다시 길 떠난다. 그리고 간혹 “들을 것이다 밤중에/ 모든 것들이 자기 이름을 빠져나와/ 거기 그대 옆/ 풀밭을 거니는 발자국 소리를”(「별장 3편-순례20」. 언어를 벗어나는 것은 또다른 길이다.


  나를 확신하기 위하여

  나의 말을 믿는다

  모든 것을 확신하기 위하여

  나는 말을 믿는다.


  확신의 그늘에서 우는 풀벌레

  확신의 울 안에서 서성이는 소

  확신과 확신 사이로 내리는 어둠

                                  「별장 3편-순례20」부분


  삶을 확신하기 위해 말을 믿지만 그 확신의 사이로는 어둠이 내린다. 그 어둠의 다른 이름은 집이다. 그러나 이 시간과 언어의 길 위에서 우리는 들어갈 쉴 집이 없다. 집은 벽이 있고 지붕이 있어야한다. 즉 집의 본질은 구분이고 경계이다. 그런데 길은 그 경계를 가로질러 가는 것이다. 그래서 길과 집이 만나는 곳에 문이 있다.


  투석전이 한창이다. 길에 있는 나를 돌멩이는 알아보지 못한다 나는 사정없이 얻어맞는다 하늘은 돌멩이의 길이다. 집들은 차가운 자물쇠로 길을 잠그고 들어오라 들어오라 너는 집이 필요하다 풀들이 소리친다 나는 풀들의 집으로 급히 들어간다 사방이 푸른 화창한 집 아 그러나 풀의 집은 벽이 지붕이 없다 나는 풀의 집에 서서 인간의 하늘 아래 서서 계속 얻어맞는다

                                           「투석전」전문


  세상에는 언어로 규정된 인간의 길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풀의 길이 있고 새의 길이 있고 또 그들의 집이 있다. 우리가 언어의 길에서 눈을 돌리면 다른 길이 있고 집이 있다. 그 순간 우리는 길로부터도 벗어난다. 길은 나를 버리고 굽이돌아가고 혹은 내가 길을 혼자 떠나 보낸다.


  2. 문 혹은 길 밖의 언어


  길은 간혹 끊어지기도 하고 절벽을 만나기도 하고 다른 길과 만나기도 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이르기도 하고 벽을 만나기도 한다. 세상에는 항상 경계가 존재한다. 그 경계하에서 모든 세계는 단절되어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정된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경계는 움직이며 틈을 만들어낸다.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생각이」부분


  인생에 대한 깨달음은 틈 사이로 온다. 그것이 설사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깨달음이라 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이런 깨달음이야말로 진정한 깨달음이며 틈으로서의 경계로서의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경계는 곧 틈에 이르고 그것은 문이 된다. 가느다란 갈라짐이 바깥의 존재를 보여주고 다시 문으로 화하지 않는가. 깨달음은 곧 문이다. 우리는 거기에 문을 발견할 수 있다. 혹은 없는 문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문은 너와 나 사이에 있고 길 위에 있다. 나는 길 밖에서 길을 보고 문을 본다.


  그 길로

  들리지 않는 비비새나 두어새 소리 사이의 길로

  지리산 화엄사의

  그 不二門을

  그 둘이 아닌 문을

  멈추지도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주저하지도 않고

  덜컥덜컥

  사람들이 들어가듯

                                  「명동1」부분


  문은 화엄사에도 있고 명동에도 있다. 우리 발 앞이 길이듯이 한 발 더 디딘 그 곳에 문이 있는 것이다. 문은 길을 허물고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인도한다.


  우리가 문을 밀고 나설 때

  그 문이

  다시 문 앞의 바람을 밀고

  그때마다 그 문이

  그대와 나의 앞과 길을

  조금씩 허물 때


  나의 무의미한 한순간의 발놀림과

  그대의 손놀림이 우리의 눈앞에

  한 잎 나뭇잎처럼 매달려

  우리의 눈 속을 기웃거릴 때


  그때다, 그대와 내가

  한 잎 뒤의 세계를

  서둘러 훔칠 때는.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순례15」부분


  발 디디면 길이 되고 열고 들어가면 문이 되지만 우리는 늘 고정된 길만을 간다. 우리 앞에 문은 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벽으로 있다. 벽이 문으로 변하고 문이 다시 벽이 되기도 한다. 너와 나를 이어주는 것은 길이지만 우리는 각자 다 자신의 집에 칩거하거나 자신의 길만을 간다. 길은 집에서 시작되고 집에서 끝난다. 길과 집을 이어주는 것은 문이다.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의 길과 나의 길이 만나야 하고 그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이 필요하다. 문은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이다. 문은 그 세계를 향해 피어있는 꽃이다.


  개봉동 입구의 길은

  한 송이 장미 때문에 왼쪽으로 굽고,

  굽은 길 어디에선가 빠져나와

  장미는

  길을 제혼자 가게 하고

  아직 흔들리는 가지 그대로 길 밖에 선다.


  보라 가끔 몸을 흔들며

  잎들이 제 마음대로 시간의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시간 밖의 서울의 일부이고,

  그대와 나는

  사촌(四寸)들 얘기 속의 한 토막으로

  비 오는 지상의 어느 발자국에나 고인다.


  말해보라

  무엇으로 장미와 닿을 수 있는가를.

  저 불편한 의문, 저 불편한 비밀의 꽃

  장미와 닿을 수 없을 때,

  두드려보라 개봉동 집들의 문은

  어느 곳이나 열리지 않는다.

                                           「장미」전문


  개봉동과 장미는 같으면서 다르다. 개봉동 입구의 길은 장미 때문에 굽어진다. 장미는 개봉동에 피어있지만 개봉동을 벗어나 있기도 하다. 장미는 인간의 세상인 개봉동의 질서와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 자유는 새롭게 길을 내는 것으로 나타난다. 나아가서 길로부터도 벗어난다. 길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곧 시간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장미가 그렇게 자유롭기 때문에 장미는 다른 세상과의 경계 혹은 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은 나아가서 다시 개봉동 집들의 문으로 화(化)한다. 장미가 열리지 않으면 즉 우리가 장미에 다가가지 않으면 개봉동 사람들의 문도 열리지 않는 것이다.


  장원의 잔디는 두 마리 흰 나비와

  그림자에 붙어 있는 한 여자를

  묶어놓고 집 안에서 반짝이고 있다

  잔디 밖의 뜰에서

  장미는 담장 안에서도

  가시가 돋아 있다

  장미가 열어놓은 문은 꽃에 있고

  빛이 집 안으로 가는 문은

  벽에 있고

  사람이 여는 문은 시멘트

  바닥부터 시작하고 있다

  장미 옆에서도 여자의 그림자는

  몸을 땅에 콱 박고

  집은 햇볕에 자리를 조금 뒤로 물리고

                                         「장미와 문」전문


  빛은 사물을 존재하게 만든다. 동시에 그림자도 만들어낸다. 각 사물은 경계를 중심으로 이쪽과 저쪽 혹은 안쪽과 바깥쪽에 있다. 그 경계는 담이 되기도 하고 벽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경계에는 문이 있다. 각 사물은 가시로 혹은 흰 색깔로 반짝이지만 동시에 그림자와 문을 가지고 있다. 장미는 장미이면서 동시에 문이다.


  어둠은 눈〔目〕이 없어 뭉치고,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뭉치고, 입이 없어 뭉친다.

  어둠은 둘이라는 숫자를 몰라 뭉치고, 언어가 없어 뭉치고, 집이 없어 뭉친다. 과거가 없어 뭉치고, 미래가 더욱 현재가 없어 뭉친다.

  그러나 그대여, 모든 것이 다 있는 그대와 나는, 뭉쳐서 독립한 저 어둠을 옷 벗고 만날 수 있는가.

  존재가 없어 뭉치고, 뭉쳐서 빛이 된 저 한 송이 흑장미의 웃음을!

                                         「어둠의 힘」전문


  어둠은 존재의 뒷편이지만 존재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늘 존재의 다른 얼굴인 어둠과 함께 산다. 그 곳은 길 밖이다. “수면은 가장 음험한 얼굴로/ 우리를/ 길 밖에 머물게 한다”(「별장 3편-순례20」). 그러면서 동시에 “사내가 딛는 것은/ 땅이 아니라 길이다”(「처음 혹은 되풀이」).


  3. 길 밖에서 길 지우기(허공에 길을 묻다)


  나는 지금 꽃밭 속에 아니 꽃 속에

  있다 흰 꽃의 그림자가 검다

  붉은 꽃의 그림자가 검다 그래도

  나는 그림자 속에 들어가 잘 논다

  꽃밭 한 쪽에 나와 애인의 집이

  하늘을 지고 있다. 애인의 방은 비어 있다

  담벽 너머 보이는 산들이 검다 나무들은

  불을 켜고 하늘을 보지 않는다

  애인 대신 덩굴장미 사이로 난 길을

  흰 나비가 날아가는 길이 있다

  날아가는 길 밑은 가시가 많다

  마른 시멘트가 뜰에서 부풀다가 깨어진다

  여행중인 애인은 가끔

  소식만 보내온다 살아 있어 어디서나

  땀이 난다고 한다. 지평선이

  때로 해를 버린다고 한다

  식탁 위의 우유와 벽이 함께 희다고 한다

  침대의 시트 색깔이 거기서도

  희다고 한다 나는 지금 꽃밭 속에

  아니 꽃 속에 있다

  흰꽃의 그림자가 검다. 그래도

  나는 그림자 속에 들어가 잘 논다

  나는 그림자 없이 검다 잘 논다

  육체에 닿은 잎들은 감미롭다

  나의 방과 비어 있는 애인의 방으로

  가는 길도 풀들이 새파랗다

  풀밭은 발바닥부터 간지럽다

                                    「꽃과 그림자」전문


  노는 것은 밖에서 노는 것이 즐겁다. 물론 놀이는 항상 규칙이 있고 우리는 규칙 안에서 논다. 그러나 늘 그것이 계속되면 이미 그것은 놀이가 아니라 관습이 되어버린다. 사실 놀이 자체는 규칙을 지키는 것과 어기는 것의 그 미묘한 선 위에 있다. 우리는 그래서 늘 경계에 서서 밖에서 노는 것을 꿈꾼다. 집 밖에서 혹은 길 밖에서 시간 밖에서 언어 밖에서. 우리는 늘 경계에서 논다. 시도 또한 그런 놀이이며 시를 읽는 것도 그렇다.

  나는 꽃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꽃의 그림자 속에 있다. 꽃은 희고 그림자는 검다. 나는 꽃 속에서나 그림자 속에서나 잘 논다. 여행을 떠난 애인은 꽃 속에 놀고 있는 나의 다른 모습이다. 어디서든 사물은 사물로서 희고 그 그림자는 그림자로서 검다. 드디어 나는 그림자 없이도 잘 논다. 사물과 그림자의 경계를 벗어나서 놀기 때문이다. 길 밖에서 노는 것은 시간 밖에서 노는 것이고 세상의 질서에서 비껴선 것이다.

  우리는 이제 길 밖에 섰다. 길이 언어이듯이 길 밖은 언어의 밖이다. 언어의 경계에도 문이 있다. 아니 경계는 언어 속에만 있다. 실제로는 없다. 그 언어는 ‘아니’이다.


  빨강

  아니


  노랑

  아니


  주황

  아니


  별 같은

  아니


  달 같은

  아니


  아니

  나비 같은


  가을

  나뭇잎들

                            「빨강 아니 노랑-산에 들에7」전문


  가을 나뭇잎은 노랑도 빨강도 주황도 아니다. 그 경계이다. 별 같고 달 같고 나비같다. 이 모두이며 이 중 어느 하나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가을 나뭇잎은 경계로서 존재하며 ‘아니’이다. 가을 나뭇잎의 본질은 ‘아니’라는 언어 속에 있다. 단풍잎은 붉고 주황색이고 갈색이고 노랑색이다. 이 모든 색이면서 이 중 어느 하나의 색만도 아니다. 그것이면서 아닌 것. 그것이 경계이다. 단풍잎의 색은 그 경계이다.


  아니


  하나/둘

  셋

  그리고

  넷

  ……………


  아니


  길가에

  길 안에

  길 밖에


  하나

  그리고

  둘

  셋

  넷

  ……………

                                          「하나와 둘 그리고 셋」부분


  사물은 언어의 형태로 존재하고 언어는 “길 가”이며 “길 안”이며 “갈 밖”이다. 사물의 본질로서의 언어는 ‘그리고’가 되기도 하며 ‘또’이기도 하다. 본질은 늘 그 경계에 있다. 그래서 오규원의 말은 항상 서성인다. 어느 집에도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집에 머물 수 없는 그의 길은 무한히 확대된다. 그것은 허공이며 발 디딜 곳이 없으니 “절벽”이다. 그 절벽의 길은 길만이 가는 길이다.


  여기는절벽입니다절벽사이로난길은길만노래하고춤추며가게나있습니다

                                               「절벽」부분


  허공은 길의 확장태이다. 수많은 길의 모태이며 복합체이다. 길이 생겨나면 허공은 배경으로 물러나고 길이 사라지면 허공은 다시 그 길을 싸안는 것이다. 그러므로 허공은 길의 잠재태이며 길의 본질이다. 길의 본질이 허무인 것을 우리가 늘 외면하고 살지만 허공은 혹은 하늘은 늘 그 자리에 있다. 그것은 허무를 넘어서 우주로 통하는 길이다. 새는 자유롭게 그 하늘을 날기도 하고 비워두기도 한다. 지상에서의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밟고 있는 길만이 전부가 아니며 우리의 언어만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사방에는 허공이 있고 그것은 길이며 우리는 그 수많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혹은 가 버린 그리고 갈 존재들을 그 허공의 길에서 만나는 것이다. “시간의 잎이 몸 하나 다치지 않고 그곳을 통과한다(「허공의 그 무게-순례5」). 존재 자체가 길이며 존재함으로 해서 길이 생겨나기도 한다.


  장미를 땅에 심었다

  순간 장미를 가운데 두고

  사방이 생겼다 그 사방으로 길이 오고

  숨긴 물을 몸 밖으로 내놓은 흙 위로

  물보다 진한 그들의 그림자가 덮쳤다

  그림자는 그러나

  길이 오는 사방을 지우지는 않았다.

                             「사방과 그림자」전문


  그림자는 길을 지우지 않는다. 그림자는 길을 품는다. 존재와 그림자가 이분되지 않는 곳에 오규원의 언어가 있다. 길이 우리에게 보이지 않더라도 길은 어디에나 있고 있는 길은 곧 사라질 길이기도 하다. 그의 언어 속에서, 꽃이 지고 난 자리, 열매가 떨어진 자리, 새가 날아간 자리 그리고 그 사나이가 서있던 자리는 그림자로서, 텅빔으로 존재하는 존재의 다른 길이다.


  서 있는 길 뒤에서

  흔한 꽃 몇몇이

  피다가 멈추고 피다가 멈추며

  꽃 질 자리를

  감추고 있습니다

  감추고 있는 그곳까지

  감추어질 길이 있습니다.

                                      「지붕과 창」부분


  우리는 오규원의 시에서 다른 세계로 가는 은밀한 입구를 본다. 그것은 장미이다. 그 장미에 닿을 수 있는 것은 오규원의 길을 따라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은 그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또다른 사람은 오규원의 시 속에서 다른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떠나 걸어오리라. 우리는 무수히 사라지고 나타나는 길들을 본다. 그 길들은 인간의 언어를 벗어나야 보이는 길이지만 동시에 시라는 언어의 길을 걸어서 만난 길이다. 오규원은 늘 이렇게 우리를 앞서 그 길을 가리라. 허공처럼 허허롭지만 모든 것이 존재하는 끝이 없는 그 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