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는 참 오랫동안 시를 써왔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의 시 속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해 관심이 있다. 김춘수 시 속의 인물들이라는 제목으로 누군가가 논문을 썼다. 참 잘 썼다. 주로 처용과 이중섭과 예수에 대해 썼다. 처용이 제일 먼저 나오는데 처용은 유년과 관계가 있고 수난을 당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중섭도 수난을 당하는 인물이며 예술가이고 떠도는 존재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범인류적인 인물이고 그 수난을 극복하는 존재다. 그래서 이 순서로 배열한 모양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나이라는 인물에 관심이 있다. 사나이는 처용단장을 비롯해서 한 번씩 나온다. 특히 눈물이라는 시에 나온 사나이라는 말에 관심이 있다. 이 시에서 사나이는 바다를 밟고 갔고 발바닥만 젖어있었고 새가 되었다고 나와있다.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예수로 보여진다. 예수가 베드로를 전도하기 위해서 갈릴리 바다 위를 걸었다고 하니까. 그러나 예수라고 만 하고 말기에는 좀 석연찮다. 물론 김춘수는 예수라고 생각하고 썼을 것이다. 하지만 앞의 논문에서도 계속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김춘수의 시 속에 나오는 역사상의 혹은 신화상의 인물들은 그 인물이긴 하지만 그 주변내용에 있어서 김춘수가 모르고 혹은 일부러 바꾸어 버린 내용들이 많다. 즉 김춘수시 속의 인물들은 반은 허구적인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바다를 밟고 간 인물이 단순히 예수라고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사나이라는 말이 참 애매하다. 어떤 데는 사람이라고 하고 있다. 사나이란 말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이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다른 인물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러니 김춘수의 시 속에 나오는 사나이들을 한 사나이라고 단정할 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한 사나이로 생각하고 이 글을 쓴다. 몇 안 되는 그 사나이들을 다시 갈라서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나이들은 일정한 공통된 이미지가 있다. 예를 들면 다 바다와 관련이 있든지 맨발이든지 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사나이가 예수와 이중섭과 처용이 합쳐진 존재고 나아가서 시적 자아 자신을 뜻하는 3인칭이라고 본다. 예수와 이중섭과 처용은 따로 따로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라 그 이미지에 있어서 겹치는 부분이 많고 같이 등장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새의 문제에 있어서도 생각해야할 것이 많다. 새가 되었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위의 논문을 쓴 사람은 새가 된다는 것은 초월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고 바다를 밟고 간 사나이가 새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가 더 인간적인 존재에서 초월적인 존재가 된 것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그런 소리를 김춘수가 할 필요가 있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건 너무 종교적이지 않은가. 김춘수는 결코 종교적인 시를 적지는 않을 사람이다. 그는 인간적인 고통과 그 극복보다는 이해에 더 관심이 있었다. 사실 극복이라는 말도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김춘수는 앓는 소리만 했지 의연한 목소리를 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새가 되었다는 의미를 초월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다른 데서 단서를 찾고 싶다. 아니 의미고 뭐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새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안 될까? 처용단장 2부 서시에 울고 간 새와 울지 않는 새가 만나고 있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래서 김춘수시에서 새의 의미를 풀어야 사나이의 의미도 풀릴 것 같다. 그런데 도저히 새의 의미가 풀리지 않는다. 이영수샘은 새의 발자국을 이야기했다. 새는 시간의 지층에 발자국을 남겼다. 정말로 이영수샘의 말대로 김춘수의 인물들은 떠도는 혹은 떠나는 인물들일까? 그렇다면 새가 되었다는 것은? 맨발, 발자국. 자유로운 존재? 슬픈 존재? 우는 존재? 소리내어 우는 존재? 속으로 울지 않는 존재?
천사와는 어떤 관계일까? 김춘수의 시적 대상은 사나이와 천사로 대별된다. 사나이는 자아이고 천사는 타자이다. 예수니 처용이니 이중섭이니 모두 사나이의 변주이다. 그리고 천사는 장미와 같은 계열이다. 아내도 천사이다. 김춘수의 시적 자아는 항상 천사를 바라보고 산다. 그런데 천사는 맨살을 보여주지 않는다. 천사는 나를 바라보는 커다란 눈이다.
새는 천사와 만난 사나이가 아닐까. 또는 천사를 본 새. 이건 모두 추측이니 논문은 되지 않겠지. 새처럼 가는 다리를 한 예수라는 말도 나온다. 새는 다리가 가늘어서 슬프다. 그리고 작은 발자국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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