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고

김혜순

선인장아니면무엇? 2011. 6. 17. 14:12

 

그녀, 말씀의 바다에서 길을 잃다

  -김혜순의 「한 잔의 붉은 거울」



  김혜순의 여덟 번째 시집은 ‘한 잔의 붉은 거울’이 아니라 어지럽게 내려 한바탕 흙탕물을 만드는 붉은 빗줄기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우주의 미만한 흐름들로 판화를 그리고 만다라를 만들고 우파니샤드를 이룩해왔다. 그래서 도달한 그림이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울고 있는 ‘슬픈 사랑기계’였다. 그러나 그 그림은 더욱 추상화되고 이제 우리는 그 그림을 알아 볼 수가 없다. 그것은 그녀가 달력공장 공장장님을 찾으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닐까? 우리를 맷돌처럼 갈아 삼켜버리는 우주라는 무서운 존재. 그녀의 슬픈 사랑기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슬픈 사랑기계는 달을 먹고 벌써 배가 불러 있다. 그녀 뱃속의 달은 익어가지 못하고 질질 흘러내린다. 그녀의 달을 익어가게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흐름이 아니라 잡아당김이다. 꾹 참음이다. 아무리 우주의 본 모습이 흐름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안에서 팽팽하게 잡아당김으로 만들어진다. 그것을 놓아버리는 순간 우리는 우주의 흐름으로 흩어져 무(無)의 영역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것은 다른 말로 죽음이다. 물론 죽음은 김혜순 시의 자양분이다. 그녀의 시는 죽음이 빗줄기로 강으로 양수로 흐르는 그 흐름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반대로 그녀의 시는 동시에 죽음의 집적체였다. 도망가려는 죽음을 내 몸에 가두기, 죽음으로 요리하기, 사랑하는 그에게 먹이기, 이런 카니발의 의식이 그녀의 시였으며 그녀의 세상 서울은 죽음이 집적되어 미로로 변하고 한 번 들어온 사람은 나갈 수 없는 무덤이 되었었다. 

  그녀가 끊임없이 달력공장 공장장님을 찾았던 것은 그가 우주의 흐름을 주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매달린다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말씀을 조롱하고 넘어서는 것이 그녀의 구원이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하루 쉬셨다는 그 주일 지금도 기억나시나요?

  무슨 말씀은 꽃이 되고 무슨 말씀은 이 입술이 되던가요?

  이 입술을 벌려 하는 말 다 알아들으시나요?

  이 리듬, 이 비유, 이 시니피에 다 알아들으시나요?

  손가락 꼽아가며 스무고개 넘나드신 그 일주일간

  무슨 말씀 치밀어서 이 귀찮은 파리떼 만들었나요?

  그 몸, 그 팔다리, 그 입술 빚을 때 무슨 말씀 하셨나요?

  나처럼 보기에 좋았더라 하셨나요?

  이 몸은 누구의 죽음을 쪼개어 꺼낸 씨앗인가요?

  아니면 누구의 삶을 쪼개어 꺼낸 죽음인가요?

  당신의 말씀, 그 말씀의 세상 뒤로 나가면

  아니 그 교란의 거울 뒤로 나갈 수 있다면

  뭔가 있긴 있는 건가요?

  당신과 나의 스무고개 이제 지겹지도 않나요?

  절대로 한 가진 안 가르쳐주는 사람, 그런 사람을

  사람들은 아버지라 부르나요?

  그럼 어디 한번 나도 말하지 않아볼까요?

  우리가 방문을 닫고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말은 몸에서 나온 실타래처럼

  우리 몸을 칭칭 감아버리고

  어떤 말은 북극과 남극처럼 멀리멀리 헤어져

  어떤 말은 눈밭의 흰 토끼처럼 서로에게 보일 수 없었는지

  절대로 절대로 당신에게 말하지 않아볼까요?

  그렇게 입 다물고 있으면 우리도 당신처럼 아버지 되나요?

  그러니 나한테 박쥐가 내 잠 들여다보고 하는 것 같은

  그런 시시한 태초에 어쩌구 하는 말씀, 하실 생각이랑 꿈도 꾸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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