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얼굴
제목이 ‘아름다운 얼굴’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아름다운 얼굴’에 대한, 다시 말하면 ‘아름다움’과 ‘얼굴’에 관한 소설이다. 이 두 문제는 서로 맞물려있다. 자신의 얼굴을 치열하게 찾아가는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그것이 진정한 예술이 아니겠는가.
나는 송기원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뭐, 지금 그 생각이 바뀌었다는 말은 아니다. 송기원도 좀 남성환타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남성환타지에 대한 나의 불만이 많이 누그러졌다. 남성환타지나 여성환타지나 다 심리현상이다. 그 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고 어떻든 그것도 욕망이 드러나는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송기원이 가지고 있는 남성환타지라는 것은 남성이 자아를 만들어가는데 있어서 여성이 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어머니가 그러하고 연인이 그러하다. 그리고 성적 경험의 도구가 되는 낯모르는 여자나 창녀도 그러하다. 송기원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장편소설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와 지금 논의하고자 하는 단편소설 「아름다운 얼굴」에 기반하고 있다. 사실 이 두 소설 외에 내가 송기원의 다른 문학작품을 무얼 읽었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에서 얼치기 양아치인 주인공은 양아치 동료와 함께 길 가는 처녀를 성폭행한다. 그것이 첫 성경험이다. 그것은 양아치로서 일종의 통과의례였으며 주인공 자신에게도 통과의례였다. 길 가다 붙잡힌, 집안을 위해서 희생하며 살아가던 평범한 이 여성은 아무 이유 없이 이 남자들의 통과의례를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송기원의 자전적인 면이 강했고 이 사건에 대한 화자의 태도를 송기원의 자신의 생각이라고 볼 때 송기원의 사고방식이 남성환타지라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르겠다. 남성환타지에 대한 생각이 변했다는 것과 관련이 될 수도 있으리라 보는데, 이에는 폭력 자체에 대한 생각의 변화도 있다. 사실 성폭행이라는 것에 대해서 나는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폭력에 대한 생각 자체가 정리되지 않았다고 해야 정확하겠다. 폭력이란 문제를 도덕적으로 따지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 폭력은 그런 이론적인 면밖에 없는 것일까. 왜 무수한 예술작품에 폭력이 난무하는가? 폭력은 어떻게 욕망과 관련되는가?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서정주의 시 「자화상」을 떠올렸다. ‘에비는 종이었다’로 시작되는 시 「자화상」. ‘사생아’, ‘장돌뱅이’가 「아름다운 얼굴」에서 주인공의 첫얼굴이다. 그러나 누구나 한 얼굴로 살지는 않는다. 항상 얼굴을 바꾼다. 중국의 ‘변검’처럼. 변검의 정체성은 여러 개의 얼굴 그 자체이다. 「아름다운 얼굴」은 아름다운 얼굴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 여정은 ‘사생아’, ‘장돌뱅이’에서 멀어지고자 하는 힘과 영원히 그 얼굴로 돌아가는 힘과의 역학관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시작은 자신의 얼굴에 대한 부정이다. 주인공은 국민학교 졸업사진과 중학교 졸업사진에서 자신의 얼굴만 날카로운 면도칼로 도려낸다. 자신의 얼굴에 대한 가장 확실한 부정이다. 그러면서도 그 얼굴을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스스로 부정한다. 자신의 얼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생아이며 장돌뱅이인 자신의 얼굴은 이제 주인공을 위악적인 인물이 되게 한다. 성처 입히고 그 죄의식에 괴로워하지만 다시 또 상처주고. 그러나 그 위악은 자신의 얼굴을 치열하게 찾아가는 과정이며 동시에 아름다움을 찾는 몸부림이다. 즉 위악이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하나의 방식인 것이다. 위악 그 자체가 아름다움인 것이다. 보들레르가 ‘악의 꽃’이란 시집을 상재하고 백남준이 예술은 사기라고 한 것처럼 위악도 예술의 한 얼굴이지 않을까. 주인공은 위악과 시의 상관성 그리고 조금더 그 맨 얼굴을 드러내야 하는 소설과의 상관성을 알게 된다.
그 다음 단계로 주인공은 아름다움의 두 얼굴에 봉착한다. 바로 자신의 얼굴과 후배의 얼굴이다. 위악을 무기로 삼고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상처받음으로써 아름다움을 향해가고자 하는 자신과 치열하게 선한 길을 가고 신념을 추구하는 후배의 얼굴. 후배의 그 얼굴에 대해서 주인공은 혹 ‘그 얼굴은 위선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후배의 얼굴도 ‘사생아’나 ‘장돌뱅이’는 아니지만 자신의 얼굴에 대한 또다른 부정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그것을 향해가는 얼굴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 그 두 얼굴은 만난다. 그 두 얼굴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이 소설의 제목 ‘아름다운 얼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