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멋진 신세계

선인장아니면무엇? 2010. 1. 22. 13:55

 

자살을 부르는 멋진 신세계

멋진 신세계/올더스 헉슬리/문예출판사



  이 소설은 논술문제의 제시문으로 한번씩 언급된다고 하여 교사들끼리 읽고 함께 이야기하기로 한 책이다. 논술에 언급되고 또 고전에 속하는 책이라 꽤 무거운 분위기의 답답한 책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소설의 분위기가 의외로 아주 가볍고 경쾌했다. SF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대부분의 SF영화들이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담고 있거나 영웅들의 액션을 전시하거나이다. 이 소설도 디스토피아의 모습을 담고 있고 약간 다르긴 하지만 빅브라더가 등장한다.

  이 소설은 참 재미있다. 아주 무거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경쾌하다. 한참 읽다가, 1932년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정말 놀란다. 그만큼 지금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나 관심사가 이 소설 속에 그대로 들어있다. 그 때 우리나라 소설은 뭐가 있었나, 얼마나 다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 읽어도 요즘의 소설이나 영화에 전혀 뒤지지 않는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

  작가는 유명한 생물학자집안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소설의 중심 생각은 생물학에 기반하고 있다. 그렇지만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성과 생식에 대한 생각은 남녀 간의 사랑과 가족문제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 두 문제는 모든 문제의 바탕을 이룬다. 나아가서 종교, 경제, 신분제도, 과학발전 등이 모두 다루어진다. 이 소설에서 가장 사람들의 눈을 잡아끄는 것은 성에 대한 사고방식이다. 우리는 생식을 목적으로 하는 부부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성을 가장 건전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그것이 가장 치욕스러운 것이며 어머니 아버지라는 말 자체가 일종의 욕이다. 그러니 가족이니 부부니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성은 유희를 위한 것이고 아이는 실험관에서 만들어진다.

  특히 예술과 관련되는 생각이 나에게는 흥미 있었는데 예술이 인간의 행복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의 문제이다. 역시 비슷한 성격의 디스토피아를 다루고 있는 영화 ‘이퀄리블리엄’에서도 예술이 감정을 일으키고 그 감정이 갈등과 질투를 만들고 나아가서 전쟁을 유발한다는 논리 하에 불태워지는 장면이 나온다. 아무런 예술의 감흥이 없는 일상의 물건들로 둘러싸인 건조한 삶이 가장 평온한 삶이라는 것이다. 이 소설 속에서의 예술은 아주 단순하고 유치하다. 간단히 오감만을 만족시키는 영화와 음악만이 존재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야민인’ 존이 ‘불행할 권리를 주장하는 대목이다. 우리는 흔히 행복할 권리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주장은 행복이 뭔지를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을 때라야 가능하다. 행복이란 것이 누군가에 의해 규정되어 버린다면, 그리고 그것이 아무런 혼란이나 갈등 없이, 나아가서 감정의 격정 없이 단지 평온만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도대체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야만인‘ 존은 그것을 거부한다. 우리는 행복할 권리가 있지만 동시에 그 행복을 나름대로 만들어갈 권리도 있다. 멋진 신세계를 자기가 혹은 자기 집단이 만들 수 있다는 자만심을 가진 사람들의 가장 큰 잘못은 행복이 뭔지 잘 알고 있다는 착각이다. 또는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의 형태가 절대적이라고 생각이다. ’야만인‘은 결국 이 ’멋진 신세계‘를 견뎌내지 못하고 자살한다.

  역시 고전은 고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독서에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고전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고전만큼 편견의 대상인 경우도 드물다. 고전이니까 꼭 읽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 고전의 세계가 자기와 맞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일 맞는다면 아주 잘 맞아서 보통의 책들과 다른 진한 재미를 준다. 맞는 고전을 만나는 것은 복이다. 오랜만에 나는 이 복을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