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고

이장욱

선인장아니면무엇? 2010. 1. 22. 12:59

 

다른 세계에서의 사랑

-이장욱의 시세계



1. 존재증명에의 욕망


  “문득 스스로를 느낄 수 없는 하루가 온다”(「투명인간」). 시는 존재증명에의 욕망에서 출발한다. “일생은 온통 아이덴티티에 관한 격조 높은 희극”(「로코코식 실내」)이다. 그래서 나는 “안 보이는 중심을 향해 집요하게 흙을 파고 드는/제 몸의 지하에 대하여”(「편집증에 대해 너무 오래 생각하는 나무」) 생각한다. “내 유일한 존재증명”(「로코코식 실내」)은 무엇인가? 존재는 꽃이다. 사랑하는 금홍이도 꽃이다. 감정도 일종의 포오즈일 뿐이고 “다만 나 자신을 위조하는 것이 할만한 일일 뿐”(「금홍아 금홍아」)이다.


  시간이 액자처럼 걸려 있었다. 사내는 뒷걸음질 치고 싶었으나 벌써 키 작은 풀잎들은 눈밭에 묻혀 있었다. 바람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그렇게 사라지는지, 비도 눈도 내린 기억이 없다. 그때 거리엔 수 년만에 내린 폭설로 몇몇 받침이 약한 차양이 부러졌던 모양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생겨난 눈의 무덤에 발목을 묻으며 그는, 저 혼자 라이브 공연하는 봄 철쭉, 봄 철쭉을 상상하며 웃었다.


  이건 어이없는 모노드라마군. 사내는 부러진 의자에 앉는다. 결국 이 눈밭에 서 있던 것은 가건물이었을까. 하염없이, 은유로 쌓이던, 정원의 사랑. 오랫동안 칩거했던 그 집은 낮은 천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는 혼자 누워 오래 숨을 멈춘 채 잠들곤 하였다. 바깥에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렸을 것이다.


  집은 헐었다 그것은 빠른 시간이었다. 여긴 어디지? 텅 빈 눈밭에 서서 그는 그 집의 허공을 신비한 자세로 이동하던 빛들을 떠올린다. 나는 다만 굴복하고 싶었지. 사내는 표정 없이 웃는다. 깨진 거울들 몇 개 부옇게 흐려져 눈밭에 꽂혀 있었다. 저, 난반사하는 생. 이제 무언가 그를 덮칠 것 같다. 갑자기 격렬한 웃음을 터뜨리는 사내 위로, 핀 조명, 서서히 저문다.

                                          「눈밭에 서 있는 남자」전문


  “문득 오랜 시간이 흘러 스스로를 위장하는 몇 가지 방법만을 배웠으니 나는 다만 내부가 있는 말의 위태로움만 이해할 수 있을 뿐”(「너무 흔한 풍경」)이다. 그 존재가 허무라고 밝혀지는 순간 나는 무섭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존재를 지향하고 믿으면 살아온 것이다. 그것이 흔들리는 순간 공포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불안과 공포는 다른 세계로 가는 경계가 된다.


  무섭다 결국 그곳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무섭다 마음이 무섭고 몸이 무섭고 싹 트고 잎 피고 언제나 저절로 흐드러지다가 바람 불어 지는 내 마음속 꽃잎 꽃잎, 그대가 무섭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육체로만 살아왔으므로 아주 정교하게 정렬해 있는 하나의 고요한 세상을 지니고 있으니,


  무섭다 그러나 나는 나를 이끄는 매혹에 최선을 다해 복종하였으므로 내 고요한 세상에 피고 지는 아름다운 모반을 주시하였다 그대가 처연히 휘날려 내 몸과 마음이 어지러울 때 단 한번도 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흘러가는 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기억을 만나면 기억을 죽이고 불안을 만나면 불안을 죽이고,


  그러므로 이제 이 눈과 코와 입과 귀를 막아 새로운 세상 보게 하시길 그대에게 익숙한 세상으로 나를 인도하여 그대 몸과 마음에 피고 지는 싹과 잎과 꽃이 되게 하시길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육체로만 살아왔으므로 아주 정교하게 정렬해 있는 이 고요한 세상을 처연히 흩날리도록, 내 몸과 마음의 꽃잎 꽃잎 피고 지는 그곳에 기다리는 이 아무도 없을지라도

                                          「꽃잎, 꽃잎, 꽃잎」전문


  그러나 그 강박에서 벗어나면 “나와 당신은 비행기와 구름 사이에 피고 지는 희미한 풍경 같아”(「객관적인 아침」)진다. 존재의 끝인 소실점이 곧 다른 세계로의 통로이다. 그래서 시인의 충고는 이것이다. “아주 조금씩 스스로를 지워가는 사물들과 더불어, 다만 어느 날, 투명한 지중해의 햇빛 속을, 산보라도 할 것”(「투명인간」).

  “액자처럼 걸려있”(「눈밭에 서 있는 남자」)는 시간을 벗어나는 것이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다. 존재의 꽃은 사라짐에 그 아름다움이 있다.


  꽃은 사라진다 사라지는 것으로서 꽃은

  햇살의 내부에서 잊혀진 어둠에 대하여,

  지하의 부러진 뼈들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사라지는 것으로서 꽃은,

  오직 사라짐에 대하여 생각함으로써 꽃은,

  단단한 화분과 난분분한 들판을 구분하지 않으며 꽃은,

  풍향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끝없이 몰려가는 바람을

  결코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꽃은,

  불타 오르거나 흐느끼지 않음으로써 꽃은,

  15층 베란다에 서서 까마득한 지상을 가늠하는 자와

  그 흐린 눈을 마주치지 않음으로써 꽃은,

  오로지 나무일 뿐인 무서운 나무들 사이에서

  아직도 견고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꽃은,

  저기 저렇게 사라져가는

  꽃은,

                              「사라지는 꽃」전문


2. 다른 세계로의 이동


  존재증명에의 강박에서 벗어나면서 가볍게 떠오른다. 그리고 다른 세계로 이동한다. 혹은 사라진다. 이장욱의 세상은 늘 아득하고 까마득하다. “기나긴 바람은 낯선 방향으로 불고 나는” “ 하릴없이 거리를”(「결국,」) 헤맨다. 다른 세계로의 경계는 어디인가?


지금 내 시선 끝의 허공에 걸려

구름을 통과하는 종이 비행기와

종이 비행기를 고요히 통과하는 구름.

이곳에서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소실점으로 완강하게 사라진다.

지금 그대와 나의 시선 바깥

                            「객관적인 아침」


이다. “ 빈 곳은 채우려 할수록 자라니까 빈 채로 두고 대문 밖 빈 하늘 바라보면 저것들, 어딘가 떨어지려고 날아가는 솜털 꽃씨들, 굿바이 굿바이 손 흔들며 나도 네게로 가고 싶어”(「금홍아 금홍아」)한다.


3. 사랑


  사랑은 배경이 되는 것이다. 행간을 해석하려는 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내가 그대의 행간이 되어 안개처럼 떠도는 것(「정주역」)이 사랑이다.  나는 그대의 배경이 되고 그대는 나의 배경이 된다. 그것이 사랑이다.